작가노트
나의 작품은 학문적 연구보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술사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내 작업을 움직이는 힘은 상상력이다. 나는 작가로써 정체성이 유동적이고, 서사가 다시 쓰이며,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는 공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안다. 내 작업은 과거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하는 행위이며, 보는 이가 공감하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문을 여는 과정이다.
나와 예술사와의 관계는 깊다. 작가로서 나는 오랫동안 특정 정체성을 배제하거나 가려왔던 문화를 탐험한다. 고전 회화는 나에게 낯설지 않고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시작점이다. 고전 작품 속에서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틈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회화를 통해 이러한 빈 공간을 채우고, 개인적으로 만난 인물과 새로운 구도를 삽입하며 기존 서사를 확장한다. 한 구간에 머물어 있기 보다는 시대와 문화 전반에 걸친 다양한 예술가들에게서 영감을 받으며, 특히 16세기 전 후반 작품에 끌린다. 격동의 시대에 탄생한 이 작품들은 알레고리(allegory)와 상징을 통해 당대의 불안을 표현했으며, 나 역시 정체성과 저항, 갈망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이를 차용한다.
회화는 나의 정체성과 깊이 연결된 매체다. 어린 시절 나에게 예술은 내가 스스로의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피난처였고 이 본능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종종 아카이브 사진과 역사적 기록에서 출발해 이를 변형하고 현 시대를 살아가는 개개인으로 재구성한다. 정형화된 이미지 속에 인물과 서사를 더하며, 사진이 지닌 공백을 새로운 상상으로 채운다. 사진을 바탕으로 한 회화는 실제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단절과 누락된 서사를 발견하고 새롭게 쓰는 작업이다. 내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신체의 개입이다. 나는 단순히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 역사적 맥락을 탐색하고 질문을 던진다. 역사에서 사라지고 삭제된 존재를 복원하는 것, 억압된 존재를 다시 등장시키는 것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저항의 행위다. 개개인의 신체는 하나의 기록이자 질문이 되며, 과거와 현재가 충돌하는 장면을 만들어낸다. 나는 이를 통해 우리의 존재 방식을 실험하고, 그 순간을 회화로 확장한다.
개개인의 이야기를 통한 나의 작품은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천천히 축적되는 행위다. 직접적인 인권운동과는 결이 다르지만, 사색의 공간을 열고 조용하지만 끈질기게 존재를 드러낸다. 예술은 역사의 패턴을 포착하고, 억압과 회복의 순환을 인식하며, 그 너머를 상상할 기회를 제공한다. 내 작업은 절대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지만, 서사가 확장될 수 있는 틈을 만들고자 한다.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공간, 불확실함 속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이 자리할 공간을.